토마스선교사에 대한 선교 평가

 

1. 바다를 건너온 흰 옷을 입은 조선인과의 만남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16:9,10)

 

토마스선교사는 1863년 7월21일 런던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받아 상해에 도착해 사역을 했으나, 그해 그의 아내 캐롤라인의 유산과 그 후유증으로 병사하자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 아픔을 잊기 위해서도 중국인들과 직접적인 접촉을 통한 전도를 위해 전도 여행과 로방전도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방법에 대해 현지의 사역 책임자와 런던선교회와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더 이상 의욕적인 사역을 할 수 없자 소속 선교회를 탈퇴하고, 제도와 사람에게 얽메이지 아니하면서 자비량 선교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사역지인 즈프(산동성 연대)로 옮겨갔다.

그 지역은 항구 지역으로서 영국.미국의 5명의 선교사들이 이미 사역하고 있었으며, 많은 교역의 상선들이 붐비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 조선 백령도의 상인들도 선박을 이용하여 자주 출입을 하고 있었고 조선반도와는 지리적으로 약 200킬로미터의 근접 거리였다.

토마스는 이미 중국어에 능통하여 그 곳 세관에서 통역원으로 일하면서 주일이면 중국인들을 상대로 예배를 인도하였다. 그곳에 상주하는 여러 선교사들 가운데 그와 가장 절친한 선교사요 협력자가 되는 알랙산더 윌리엄슨을 만나게 된다. 그는 스코트랜드 성서공회 소속으로서 선교에 많은 경험이 있었고 토마스에게는 충실한 멘토 역할을 해주기도 했다.

윌리엄슨은 그 항구에 은밀히 출입하는 중국인이 아닌 흰 옷을 입은 조선인들과 보게되면서 특별히 그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어느 날 중국인들의 소개로 그 조선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토마스선교사도 합석하였다.

그가 만나 본 조선인들은 놀랍게도 천주교인이었고 중국인들과는 다른 기질에 각별한 인상을 받았다. 이들로부터 조선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서 조선에 천주교의 활동과 조선 천주교인들과 외국인 신부들이 처형된 이야기에 대해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토마스선교사와 윌리암슨은 마련된 식사를 하기 전에 조선인에게 식사 감사 기도를 부탁하자 그 조선인은 망설임없이 너무도 간절한 어조로 기도하는 가운데 모두가 왠지 가슴 속에 뜨겁게 느껴지는 감동을 받았다. 그 조선인은 자신이 목에 걸고 있는 십자가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들과의 대화는 늦은 밤까지 계속 될 정도로 모두가 진지했고 신천지를 보는 듯 조선에 대해 깊이 빠져들어갔다.

윌리암슨은 후일에 조선인들에 대한 소감을 소속 선교회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저는 조선이 현재 어떤 나라인가 하는 것보다 앞으로 어떤 나라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분명히 조선은 큰 역량을 지닌 나라입니다. 조선인들은 절대로 평범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부지런하고 빈틈히 없으며 영리하고 게다가 단호한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두 선교사가 만난 그 조선인은 김자평(金子平, 1789~1868)으로 독실한 천주교도로서 중국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천주교 신부들을 생명을 걸고 안내하는 일에 헌신하였었다. 그는 본래 조선 백령도와 산동성 연대를 오가면서 밀무역을 하는 상인이었다. 토마스 선교사가 1865년 조선 1차전도 여행 때(백령도와 옹진반도 등) 길잡이를 해 주어 조선의 복음전파에 일조를 하게 된다.

그는 훗날 1867년에 셔만호 사건의(1866년) 진상을 조사하러 온 미국인 선교사 코빗(Hunter Corbett)에게 그 사건에 대해 소상히 설명해 주기도 하였다. 그는 후일에 그 일에 관여한 사실이 들어나게 되어 황해 감사에 의해 체포되어 1868년 4월 참수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토마스선교사에게 조선인을 앞서 만나 조선에 대한 상황과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결단을 하게하는 데 김자평을 예비하신 것이었고 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길잡이로 만나게 하신 것이었다. 이는 마치 사도 바울이 유럽이라는 신천지와 같은 새로운 사역지에 루디아를 앞서 예비하셔서 그 땅에 복음이 전파되게 하신 것같이 동일하게 역사하신 것이었다.

 

토마스는 조선인을 만나면서 자신이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의 학장시절 때 독일인 선교사 귀줄라프가가 아시아권을 전도여행을 한후 귀국하여 쓴 책 중에 조선에 관한 부분을 밑줄을 그으면서 읽었던 기억이 되살아 났다. 은둔의 나라인 조선 땅은 토마스에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새로운 사역의 산지요 언약의 땅처럼 강한 도전이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조선을 향한 비젼을 가슴속에 만 담아 둘 수 없었고 그 땅을 향해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토마스는 더 지체 할 수없어 윌리엄슨에게 자신은 조선 전도를 위해 그 곳으로 가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었다. 윌리엄슨도 조선에 상당한 관심을 갖게 된터라 그도 흔쾌히 동의하였다. 그 뿐만아니라 적극적으로 협조해주기로 하였다.

조선 전도 여행을 위해 그 다음 날부터 김자평을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조선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토마스는 출항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였고 윌리엄슨도 마치 자신이 가느냥 전폭적인 도움을 주려했다. 두 사람간에는 사역의 사무적인 관계를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토마스는 이미 런던선교회와는 결별한 상태였기 때문에 만일 그 신분으로 조선 사역을 위해 간다면 일반인 신분으로 가게되는 것이었다. 즉 이에 대한 신분 정립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들 간에 합의된 것은 이번 조선 전도여행은 스코트랜드 성서공회의 대리인 사역자로 가는 것이고 이를 위해 최소한의 여행 경비와 한문 성경과 전도지를 제공받은 것이었다. 토마스는 그 동안 세관의 통역 일을 보면서 그에 대한 보수를 받았기에 어느 정도의 돈은 모아둔 상태였기 때문에 윌리암슨이 사례비를 제공하려했으나 완곡히 거절하였고, 결과적으로는 조선선교를 위해 자비량 사역자가 된 것이다.

 

2. 조선의 멜리데 섬 백령도를 향해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행28:1,2)

 

1865년 9월4일 토마스는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들뜬 마음으로 자그마한 어선에 김자평과 동료인 조선인과 선주인 중국인 우웬타이(于文泰)와 함께 조선의 섬인 백령도로 출항하였다. 거친 황해를 나흘간 항해 끝에 마침내 백령도에 도착하였다. 그들이 처음 상륙한 곳은 백령도 두문진 포구였다. 토마스선교사는 그간 익혀둔 조선말로 전도와 성경책 , 전도지를 나누어주었다. 그 섬에서 그와같은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감자평과 중국인이 그 지역의 관리와 친분 관계가 돈독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그와같이 그 외딴 작은 섬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는 도중에 멜리데 섬에 난파된 상태로 상륙하므로 복음을 전혀 들을 수 없었던 소외된 토인들에게 전해졌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백령도에 복음의 씨가 토마스를 통해 심어지게 한 것이었다. 140여년이 지난 지금 백령도에는 섬주민의 65%가 기독교인이요 교회가 12개나 세워져 있다. 이는 분명 토마스선교사로 말미암은 것이요, 그 사역이 헛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라 볼 수 있다.

토마스는 이제 섬이 아닌 조선 내지에 복음을 전하고 싶은 의욕에 사로잡혀 선주에게 강청하여 약7일이 지난후 황해도 창린도 자라리에 상륙하여 성경과 전도지 등을 전해주었다. 그러나 신변의 위험 때문에 유숙은 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조선 실록에서는 그때 토마스선교사가 배포한 증거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배에 타고 있던 한 영국인이 모래사장에 종이 뭉치 하나를 던지고 남해를 향해 달아났다. 그 종이 뭉치 속에는 종이 한 묶음과 16권의 금서와 서양 달력이 있었다”

 

토마스선교사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내침김에 조선의 수도인 한양으로 가고자 하여 중국인 선주에게 강청했으나 그가 다른 일정 관계로 불허하자 다른 조선배를 소개받아 높은 선가를 주고 강화도쪽으로 가는 도중 예상치 못한 강풍을 만나 파선되다시피하여 구사 일생으로 생명은 보존할 수 있었다. 의욕이 너무 앞섰던 그는 여러번의 배를 갈아타고 천신만고 끝에 요령성 어느 포구에 당도하였고 선교사들이 있는 신변이 보장되는 북경까지 가야했다. 근 4개월만에 모진 고생을 다겪은 후 마침내 북경에 당도하게 되었다.

 

3. 북경에 온 조선 사신들과의 만남

 

북경은 런던선교회의 지부가 있는 곳으로 중국선교에 20여년의 경륜이 있는 에드킨스(Joseph Edkins) 선교사가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된 토마스선교사를 따듯이 맞이해 주었고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았으며, 새로운 사역지에서 중국인 사역에 팀사역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북경은 주변의 18개국으로부터 많은 사신들이 왕래를 하였으며 조선은 일년에 3차례 (새해. 황제의 생일. 황태자 생일) 보내졌었다. 나중에는 동지 시기나 조선의 새 왕이나 왕비가 세워질 때도 왔으며 그 규모는 300명에서 많게는 500명이 넘는 대 규모의 사신 행렬도 있었다.

이러한 환경은 북경에 주재하고 있는 선교사들에게는 각국으로부터 입경하는 다양한 사신들을 자연스럽게 접하거나 기독교를 소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토마스선교사는 산동성 연대에서 조선인 교제와 백령도까지 진출하여 복음을 전하였기에 조선에 대한 애착과 관심은 남다른 것이었다. 그로인하여 조선의 사신들에게 적극적으로 접근을 하였다. 그는 1866년4월4일에 런던선교회로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었다.

 

“해마다 정기적으로 중국을 방문하는 조선 사절단이 막 베이징을 출발했습니다. 저는 베이징에 있는 다른 외국인들보다 조선인들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조선에 대한 약간의 지식은 그들의 숙소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조선에는 천주교 선교사가 11명 있으며 수천명의 천주교 개종자들이 있습니다. 작년에 조선에 머무는 동안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천주교의 교리와 사제에 대해서는 지극히 헌신적이면서도 우리 기독교의 좀더 순수하고도 단순한 믿음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선교부는 일본, 조선, 몽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

 

토마스는 그 사신들에게 전도를 했으며 성경을 선물로 주었다. 놀라운 사실은 자신이 작년 가을에 백령도와 옹진반도 어느 육지에 던져준 성경이 평양에까지 전해져 그 성경을 읽은적이 있었다는 증언을 듣게 까지 되었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사신 가운데 한 명은 성경을 더 요구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의 선교보고서에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박(朴)가라는사람이 며칠전에 제게 말하기를 평양에 배포된 책을 한권 입수하여 정독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조선말로 야소교책이 매우 좋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생각할 때 조선인은 기독교의 진리에 대하여 적개심을 품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조선 사람들이 우리의 기독교 서적을 열정적으로 읽는다는 것을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습니다.”

 

4. 조선을 행한 2차 전도 여행 준비와 하나님의 예비하심

 

북경에서 얼마 동안 조선의 사신들을 접하면서 조선이라 나라와 조선인들에 대한 끓어오르는 선교의 열정은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다. 이미 그의 가슴에는 오직 조선선교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조선은 이미 천주교 신부들과 조선 천주교인들에 대한 무참한 박해가 계속 진행되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고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토마스선교사에게는 그러한 조선의 정세가 두려움을 갖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핍박을 받고 있는 그 땅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기업의 땅으로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 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토마스는 조선을 가기위해 어떻게 가야할지 어느 곳을 목적지로 정해야 할지 모든 것이 미확정 된 상태였다. 그는 일단 최초로 조선인을 만나 본 연대(煙臺)가서 처음부터 다시 준비를 해야했다. 그 곳은 가장 단거리로 조선을 항해 할 수 있는 곳이고, 여행 경비를 스스로 확보할 수 있는 항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역의 동료들이 있기에 여러 모로 적합하였다.

조선을 가기위한 분주한 준비는 하였지만 선편이 마땅치 못하였다. 공개롭게도 지난번 자신을 백령도로 데려다주었던 김자평이 연대에 와있었다. 그 또한 토마스가 원하면 지난번과 같이 기꺼이 함께 가겠다는 호의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배는 너무 작은 관계로 항해의 안전성과 많은 성경을 싥고 가기에도 적합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전혀 예상치 못한 미국 국적의 상선이 연대에 입항하였고 신기하게도 그 배는 조선의 교역을 위해 준비를 하던 배였으므로 조선으로 가는데 항해의 안내인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토마스는 그 배에 대해 고려해 볼 필요조차 없었고, 항해 목적지가 한양이 아닌 이북 지방의 평양이라는 것이다. 불과 몇 달전에 평양에서 온 사신을 만난 일과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었다.

 

그는 작년 백령도에 갔다가 내침김에 한강을 거술러서 한양으로 들어가고자 시도도 한 바있었는데, 북경에서 만난 평양 관리들을 통해 들어본 평양이라는 지방이 오히려 그에게 더 큰 호기심을 느끼게 했다.

한국 교회사에서 토마스 선교사의 평양 대동강 순교의 사건은 평양의 복음화에 지대한 영양을 주었다. 만일 이 배가 평양이 아닌 다른 지방으로 갔다면 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은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또한 놀라운 하나님의 조선을 향한 구원의 섭리였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김자평의 조선 배가 아닌 미국 상선으로 결정되었다는 것도 하나님의 관여하심이었다. 미국적의 셔만호의 사건은(1866년 9월) 조선과 미국과 국교 관계(1882년)를 맺게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고 이로인해 조선반도에 미국의 선교사들이(1884년 9월 의사선교사인 알렌의 입경과 1885년 4월5일 언더우드,아펜젤로) 들어올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만일 토마스가 김자평의 배를 타고 한성으로 향했다면 한반도의 복음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5. 미지의 평양도성과 광야의 외침

 

조선 평양으로 향하는 출항의 준비는 완료되었다. 토마스 선교사는 마치 출전을 앞둔 전사와 같은 심정으로 자신을 파송한 런던선교회에 비장한 각오의 서신을 보냈다.

 

“이번에도 상당히 많은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가지고 출발하며, 이 모든 것이 그 곳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 기독교 선교사가 한번 들어갔던 나라에 다시 들어가는 일의 중요성에 대한 지부장 에드킨스와 다른 여러 선교사들의 제안은, 저로 하여금 조선내륙의 선교를 결심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앞으로 굉장히 유익한 방향의 변화를 불러 올 것입니다. 이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서의 로마카톨릭의 실수와 순수한 성경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우리의 노력을 이사회가 신뢰할 것을 믿습니다. 1866년8월1일. 토마스선교사”

 

평양을 향한 출항을 앞둔 토마스선교사는 자신이 평양에 가면 북경에서 만났던 사신들과도 재회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기도 했다.

성경과 교역물자를 실은 제너랄셔만호는 백령도를 첫 도착지로 정하고 황해를 건넜다. 토마스는 그 곳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았고 주민들과 군인들에게도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 훗날 백령도의 최익로라는 그 곳 주민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외국인들 중 한명이 유독 친절하여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 당시에는 그가 우리에게 나눠 주었던 음식물들에 대해 잘 몰랐지만, 지금은 그것이 케이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그로부터 몇권의 책을 받았는데 후에 조선 군인들의 위협적인 태도에 우리는 그 책을 버리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관리는 외국인이 나눠 주었던 책 모두를 관청으로 가져오라고 명령한 후에 그 책들을 다시 옹진해군 관청으로 보냈다.“

 

백령도를 떠나 그 근방의 작은 돛섬에서는 공개롭게도 지난 1차 조선항해 때 자신의 배를 직접 몰았던 중국인 우웬타이를 만나게 되었고, 그는 대동강으로 셔만호가 항해하는데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이로인해 평양을 향한 항해는 매우 순조로왔다. 배가 대동강 입구에 들어서자 우웬타이는 최근의 조선 정세가 매우 험악하다는 점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셔만호 선장과 선주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우웬타이는 그들에게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들어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며 자신은 더 이상 안내를 하지 않겠다며 도중에 하선했다.

 

 

제너럴셔만호는 거침없이 평양을 향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대동강변의 주민들과 관가의 관리들은 난생 처음보는 거대한 배의 모습과 서양사람들이 기이하기도 하였으며 그 위세에 위협을 느꼈다. 1866년 8월17일 대동강 급수문에 도착했으며, 이에 조선 정부는 사태를 조사하기 위해 평양관가의 문정관(問情官)을 파견하여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며 조선은 외국과 통상을 할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설득하였다. 그러나 셔만호는 평양행을 고집하며 자신들이 필요로하는 음식물을 강력히 요구하기까지했다. 문정관은 외국에서 온 그들을 예의를 갖추며 선대하여 쌀과 쇠고기 30파운드, 계란260개, 야채20꾸러미, 장작20더미를 제공하기까지 했다.

대동강 변에 사는 일반 백성들은 이 기이한 외양선을 구경하러 몰려들기 시작했다. 토마스선교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작은 배를 내려서 강가에 나와 아무 적의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백성들에게 성경책과 기독교 책자를 온 힘을 다해 나누어주었다. 훗날 기독교인이 된 박민우라는 청년도 성경을 받아보았고 토마스선교사가 어눌한 발음으로 조선어로 전도하는 것을 흥미롭게 들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8월20일에는 대동강 나루터 장사포에 도착했는데 그날 마침 근처에서 장이 열려 수천명이 이 배를 구경하러 왔다. 시장에 나와있던 홍신길(洪信吉)이라는 소년은 외국에서 배가왔다는 소문을 듣고 다른 친구 2명과 함께 배를 저어 그 외국배에 구경가자고 제의하여 마침내 토마스선교사를 만나게 되어 그의 방으로 안내되어 성경책자를 선물로 받았고 감자라는 기이한 음식물을 먹어보기도했다. 그 소년들 가운데 배자근 소년은 집으로 돌아와 서당선생인 할아버지에게 자랑스럽게 성경책을 보여드렸으나 할아버지가 심하게 꾸짖자 대동강에 내다버렸다.

 

그날 밤 쑥개마을에서 9명의 조선청년들이 성경을 나누어준 모습을 본 토마스를 만나기 위해 밤에 은밀히 찾아왔다. 그들의 이름은 장인국, 장용국, 표영보, 지달수, 지달체, 지택구, 지택붕, 지택주, 지달해였다. 그 중 장용국만 제외하고는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

 

 

지달해(池達海) 청년은 1864년 불란서 천주교 선교사 다불뤼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은후 그 마을에 있는 친척들에게 천주교리를 전하고 그들 모두가 천주교인이 되도록 한 인물이었다. 평양의 지달해를 비롯한 천주교 청년들은 셔만호가 프랑tm함대가 천주교박해 사건을 수습하러온 배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날마다 대동강가에 나가 자신들을 구원해주러 올 프랑스 배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애타게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당시 평양의 천주교인들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있었으며 셔만호가 나타나자 그들은 평양일대의 천주교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그 배의 일행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그들은 셔만호의 갑판에서 토마스 선교사를 만났다. 그들은 토마스 선교사를 추호의 의심도 없이 프랑스신부로 확신하고 벅찬 마음으로 대면했다. 그들은 서툰 중국말로 조선의 천주교인들이 처한 위급함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토마스선교사가 조선말로 자신은 프랑스 천주교 신부가 아닌 개신교 영국선교사라고 설명을 했지만 그 청년들은 그 내용을 이해하질 못했다. 토마스선교사의 마음도 간절히 도움을 청하는 그들에게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함을 안탑깝게 생각하면서 그들을 힘써 위로하려 애썼다.

 

토마스는 그들에게 성경책과 기독교 서적을 주면서 빅토리아여왕의 초상이 새겨진 은화도 선사하였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은화의 여왕 형상을 성모마리아의 형상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훗날(1867년1월22일) 그 셔만호의 사건이 종결된 다음 지달해와 지달수 두 형제는 그 배에서 외국인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평양의 보통문밖에서 참수되고 말았다.

1866년8월17일 셔만호는 평양 상류로 더 항해를 하여 석호정으로 이동하였고 이배에 대한 소문이 평양 도성에까지 전해지면서 평양 주민들은 긴장과 호기심을 갖고 강변으로 몰려들었다.

토마스는 이러한 기회를 통해 전도에 힘을 쏟았다. 성경책과 기독교서적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 그 때 기독교 서적을 받은 평양인들 가운데 김영섭은 진리역지라는 책을 선물받고 남몰래 읽은 후 마침내 기독교인이 되었고 아들 김종권, 조카 김성집에게도 그 진리를 가르쳤고 후에 그 두 사람은 평양의 어느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8월22일 셔만호는 만경대 근처의 작은섬 두루도에 닻을 내렸다. 토마스는 이곳에서도 약 100여건의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 이 당시 조선은 대원군의 철저한 쇄국정책하에 있던 때였기에 평양도성은 이 외국 배의 갑작스런 출현에 첨예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평양 감사인 박규수는 셔만호의 평양 진입에 대해 몇차례의 만류와 경고를 하였으나 그 배는 막무가내식으로 만경대까지 올라왔다. 박규수 감사는 셔만호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방어선을 구축시켰다. 배가 대동강에 들어온 때는 늦장마가 시작되면서 강 수위가 높아졌기 때문에 만경대까지 올라 올 수 있었다.

 

6. 평양 대동강에 부어진 순교의 잔

 

1866년 9월4일 그믐이었기에 달 빛도 없는 어두운 밤 셔만호는 물이 빠져나간 강의 진흙바닥에 좌초되고 말았고, 설상가상으로 쑥섬에 갇히게 되었다. 이같이 전세가 유리하게 전개되자 박규수 평양감사는 그 다음 날 9월5일에 유황을 뿌린 잡목들을 실은 거룻배에 불을 붙여 셔만호를 향하여 떠내보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불붙은 작은 배들이 토마스가 승선해 있는 그 배에 닫자 마자 이내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박규수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조선군인들로 하여금 화살과 총포를 총동원하여 거대한 외양선을 벌집처럼 만들어 버렸다.

제너럴셔만호가 볏집처럼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자 모든 승무원들은 목숨만이라도 구하기 위해 배에서 뛰어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흥분된 조선군인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토마스선교사는 훨훨 타오르는 극한 상황에도 대동강변에 나와있는 평양백성들을 향하여 힘써 외치고 있었다. “야소” “야소”.... . 화마처럼 자신을 향해 타오르는 불길도 조선백성들을 향한 토마스선교사의 복음의 열정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그는 한권의 성경이라도 조선백성들의 손에 쥐어주고 싶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배에서 뛰어 내려 자신을 향해 공격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성경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토마스 자신도 그의 생명을 주님 앞에 드리는 순간이 왔다는 것을 느꼈기에 더 이상 주점함이나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타오르는 불길을 뚫고 한권의 성경을 가슴에 품고 배에서 뛰어 내리었다. 대동강 쑥섬에 기어올라 온 토마스는 조선군인에게 잡혔고 자신 앞에 서있는 조선 병사에게 예수를 믿으라면서 가슴에 품고 있었던 한 권의 성경을 그에 주었다. 그러나 그 병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뿌리치고, 그가 가지고 있던 칼로 토마스선교사의 가슴을 찔렀다. 힘없이 쓰러진 그의 가슴에서 솟아나는 피는 모래밭을 적시고 대동강 물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이 선교사가 바로 한국 교회사에 최초의 순교한 선교사였다. 그이 나이 27세. 조선 땅에 최초로 들어와 복음을 전한 그는 토마스선교사(Robert Jermain Thomas)였다.

 

7. 순교의 가해자 박춘권의 회심과 널다리골 교회

 

셔만호의 격침에 누구보다도 많은 공로를 세우며 토마스선교사의 가슴에 칼을 겨눈 혈기 등등한 한 평양의 병사가 있었다. 한국교회사 100년에 토마스를 순교시킨 인물로 또 평양의 최초의 교회이며 장대현 교회의 전신인 안주 널다리골 교회의 영수, 박춘권(朴春權)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조선말기 평양 중군 이현익휘하의 관군으로 6척장신의 기골에 용맹한 군인이었다. 셔만호에 대한 화공에 직접 관여하여 누구보다도 혁혁한 공을 세워 오위장이라는 관직을 얻었으며 구전된 이야기에는 그가 토마스선교사를 직접 살해했고 토마스가 전해준 그 성경책을 집으로 가져가 보관했고 훗날 성경을 보면서 회심하였다고 한다. 확실한 사실은 그가 30년이 지난 후 Samuel A. Moffet선교사가 평양을 방문했을 당시 그를 찾아와 주님을 영접하고 널다리골 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마치 사도바울이 회심하기 전에는 예루살렘의 초대 성도들을 핍박하고 빌립집사가 순교 당할 때에 이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혈기 왕성한 인물이 후에 예수님의 부르심에 가장 열정적인 복음의 사도가 된 사실과 너무도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성 밖에 내치고 돌로칠 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테판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하고 무릎을 끓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행7:58~8:1)

 

1918년부터 평양의 총회는 토마스의 전도행전과 순교 사건을 조사하면서 그를 직접 만나보거나 성경을 받았던 사람들을 200여명을 찾아내어 증언한 자료가 1928년 오문환 장로에 의해 <토마스 목사전>을 출간 하였다.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황명대는 친히 목격하였던 이 광경을 오문환장로에게 증언하였다. 증언할 당시 80세의 고령이었던 그는 평양 부근 장로교회의 신자였다. 이 대동군 대동면 조왕리 교회는 1932년 토마스목사 기념 교회로 선정되었다.

 

토마스선교사가 순교할 당시 11세였던 최치량은 숙부와 함께 대동강변에 구경하러 갔다가 토마스선교사가 뿌린 성경3권을 얻어 집으로 가져왔고, 그때 20세였던 여인 이신행도 성경 한권을 얻었고 훗날 그녀는 평양에서 최초의 여성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녀의 아들인 이덕환도 교인이 되어 장대현교회의 장로로 시무하였다.

1866년 9월 4일 제너럴 셔만호의 사건이 종결된 후 박규수 평양 감사는 토마스선교사에 의해 뿌려진 수백권의 성경과 전도 책자의 소지자에 대한 체포령과 회수령을 내려 많은 사람들이 그 성경을 버렸다. 이 때 버려진 성경을 수집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평양 대동문 안의 영문주사의 관직자였던 박영식이었다. 그는 자신의 집에 걷어드린 성경을 뜯어 벽지로 사용하였다.

 

후에 박영식의 집을 토마스선교사가 나누어준 성경을 갖고 있었던 평양의 최치량이 구입하여 여관으로 사용하므로 이 여관에 머무는 여행객들은 자연스럽게 성경을 자신도 모르게 접하게 되었다. 매우 흥미로운 일인 것이다. 1893년 마팻선교사는 평양에 선교부를 두기위해 이곳을 방문했을 때 바로 이 여관에 투숙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집 주인인 최치량이 기독교인이 되어 그 여관이 나중에는 교회로 사용되었다. 최치량은 그 교회의 개척 멤버였다.

이는 마치 사도행전이 재현되는 것 같은 일화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이 2차 빌립보성으로 전도 여행시에 루디아의 집에 유하므로 그 집안이 구원받고 그 처소가 빕립보의 가정교회가 되었던 사실과 동일한 역사이기도 하다.

마팟선교사가 평양에 선교본부를 두기 위해 방문한 사실도 토마스선교사의 순교와 유관한 것이며, 그가 평양을 방문할 당시에 이미 토마스에 의해 뿌려진 성경으로 인해 자생적인 기독교인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는 마팟선교사가 평양도성 대동문안에 교회를 개척할 때 토마스선교사에게 얻은 성경책을 들고 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는 것이다. 토마스선교사에 의해 평양에 뿌려진 성경을 가진 사람들은 그의 마음속에 북음의 새 순이 돋아나고 있었던 것이며, 마팻 선교사는 그 증거를 확인한 것이었다.

 

이같이 토마스선교사가 죽는 순간까지 힘써 성경을 뿌린 것이 평양 초대 교회의 태신자들을 탄생시켰으며 평양교회의 초석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박춘권영수가 섬긴 평양 널다리골교회는 1894년 마팻선교사가 그 동네의 29명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예배드림으로 개척된 것이다.

이 널다리골 교회는 후에 크게 부흥이 되어 1903년에 72칸짜리 큰 예배당으로 건축하면서 교회 이름을 장대현교회로 개명하였다. 이 장대현 교회는 평양의 장자교회 역할을 했으며, 한국교회 부흥의 전환점을 가져온 1907년 대부흥운동의 발원지가 바로 이 교회였다. 이는 토마스선교사의 평양에서의 한알의 밀알이 된 순교가 장대현교회의 탄생과 그 교회를 통해 발원된 부흥운동을 잉태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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