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레이크 박사와 나란히 방한한 세바스티앙씨는 "절친한 사이인 드레이크 박사로부터 6·25 당시 고아들과 병사들이 우정을 나눴다는 이야기를 듣고 작품 기증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드레이크 박사가 한국 정부에 이런 뜻을 전해 평화누리공원에 조각상이 들어서게 됐다.
드레이크 박사는 전쟁고아들을 돌보던 일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회고했다. 그러나 12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이 모든 기억을 마음속 '서랍'에 넣고 지냈다. 전후 반세기 가까이 그는 '한국'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6·25는 올바른 전쟁이었어요. 그렇지만 올바른 전쟁도 참혹합니다. '한국'과 관련된 거라면 무조건 싫었어요."
그는 1953년 12월 전역한 뒤 외교관으로 남미에서 근무하다가 워싱턴주(州) 웨스턴워싱턴대학 교수(사회학)로 정년퇴임했다. 잊고 살던 한국과 다시 맞닥뜨린 것은 1998년이었다. 그는 부인 메리 앤(80)과 공무(公務)로 일본에 갔던 길에 한국을 여행했다. 그는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바퀴를 내리기 전부터 격하게 울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몰라보게 발전한 대한민국이 그를 맞았다. 지하철에서 옆 자리에 앉은 한국 남성이 "혹시 참전용사냐"고 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국인 승객들이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박수쳤다.
이후 네 차례 더 방한했다. 오래 묵은 고통이 사그라지면서, 그는 전쟁고아들을 도운 미군의 활동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6·25 때 미군은 고아원 400여개를 세우고 고아 5만4000명을 돌봤다. 한 달 봉급 50~100달러를 받는 병사들이 십시일반으로 3년간 200만달러를 모금했다. 다른 유엔군도 부대마다 전쟁고아들을 수십~수백 명씩 거뒀다.
드레이크 박사는 "연약한 어린이들이 혹독하게 고통받는 것을 목격하면서 '상처받은 사람에 대한 동정'이 솟아올랐다"며 "외교관으로, 교수로, 사회운동가로 살아오면서 늘 약자를 지키고자 했는데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을 6·25가 가르쳐 준 것"이라고 했다.